[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반세기 전 반도체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내린 과감한 투자 결단이 인공지능(AI) 시대에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1974년 사재를 털어 시작한 반도체 사업은 불황에도 멈추지 않은 선행투자와 기술 혁신을 거쳐 세계 1위 메모리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선대회장이 강조한 초격차 기술과 인재 중심 경영은 AI 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이어지며 삼성의 미래 성장 기반이 되고 있다. 서거 6주기를 맞아 한국 반도체 산업의 도약을 이끌고 문화유산 보존에도 힘쓴 이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과 유산이 재조명되고 있다.
23일 삼성전자와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이날 오전 경기 수원 선영에서 이 선대회장의 6주기 추도식을 진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유족과 주요 계열사 경영진은 기일인 25일을 이틀 앞두고 선영을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 불황에도 멈추지 않은 투자…20년 만에 메모리 세계 1위
서거 6주기를 맞아 반도체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세계 1위 메모리 기업을 일군 이 선대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경영 혁신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선대회장의 반도체 도전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성 계열사 이사였던 그는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사재를 투자했다. 국내 전자산업이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세계 반도체 기업들마저 오일쇼크 여파로 구조조정에 나서던 시기였다.
삼성 내부에서도 사업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도체를 단순한 부품 사업이 아닌 국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미래 산업으로 본 것이다.
본격적인 도약은 1983년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도쿄선언'을 계기로 시작됐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던 생산공장 건설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주도하던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기술격차를 좁힌 비결은 불황을 활용한 선행투자였다.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을 확대할 때 삼성은 6인치 웨이퍼로 전환했다. 1987년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업황 악화로 투자를 축소하는 상황에서도 신규 생산라인 건설을 추진했다. 1990년대에는 8인치 웨이퍼 양산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하며 생산성과 원가 경쟁력을 높였다.
이 같은 전략은 기술과 시장점유율의 역전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고 같은 해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올라섰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1974년 반도체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지 약 20년 만에 세계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이 선대회장은 기술투자와 함께 조직문화 혁신도 추진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양적 성장에서 품질 중심으로 경영방식을 전환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은 제품뿐 아니라 조직과 제도, 일하는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생산현장에는 불량이 발생하면 원인을 해결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1995년에는 품질 기준에 미달한 휴대전화 등 약 500억원 규모의 제품을 폐기하며 품질경영 원칙을 강조했다.
인재 육성도 장기투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1990년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는 직원들을 해외에 장기간 파견해 현지 언어와 문화, 시장을 익히도록 한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과 설비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이해하는 인력을 확보해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 반세기 전 승부수의 결실…AI 시대에도 이어지는 초격차
반세기가 지난 현재 반도체 산업의 중심은 AI로 이동하고 있다.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와 대규모 데이터 저장장치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D램과 낸드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글로벌 D램 시장에서 매출 기준 39.4%, 낸드 시장에서 29.3%의 점유율로 각각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과거 PC와 스마트폰 중심으로 성장한 메모리 사업이 이제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세계 1위의 경쟁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도 남아 있다.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차세대 D램과 고적층 낸드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불황기 선행투자로 기술격차를 뒤집었던 삼성의 투자 전략이 AI 시대에도 유효할지가 향후 경쟁력을 가를 전망이다.
◆ 2만3000점 문화유산 기증…세계로 뻗어간 이건희 컬렉션
이 선대회장이 남긴 유산은 산업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평생 수집하고 보존한 문화재와 미술품은 유족들의 기증을 통해 국민이 향유하는 문화자산으로 전환됐다.
유족들은 2021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 점을 기증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비롯해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건희 컬렉션의 국내 순회전 누적 관람객은 35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시작된 해외 순회전은 올해 시카고를 거쳐 이달 영국 런던 영국박물관으로 이어졌다. 영국박물관이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을 개최한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한 장기투자와 문화유산을 보존해 후대에 남긴 활동은 이 선대회장이 산업과 문화 분야에 남긴 두 가지 유산으로 평가된다. 서거 6주기를 맞아 미래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기술·인재를 중시했던 경영 철학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syu@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