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전미옥 기자 = 수개월간 이어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공세에도 이란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란 권력은 더 젊고 강경한 지도부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4일(현지시간) 안보 당국자와 전문가들을 인용해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이 이란 내 강경파 정권의 결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이날부터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를 위한 6일간의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테헤란 도심의 대형 야외 기도시설인 이맘 호메이니 대모살라에는 이른 새벽부터 수십만명의 조문객이 몰렸고 이들은 '피의 복수'와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을 외치며 하메네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란 당국은 테헤란에서 열리는 하메네이 장례식에 최대 2000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관련해 WP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공세가 이란 체제를 약화시키기는커녕, 혁명수비대(IRGC)와 정보기관 출신 강경파들이 권력 핵심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새 권력의 중심에는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있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공습 당시 부상을 입은 뒤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은신 상태에서도 핵심 전략 결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를 보좌하는 새 지배층은 과거 세대보다 젊고 국가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켜보며 미국의 약점을 학습했고, 외교와 온라인 여론전 등 소프트파워 활용에도 이전 지도부보다 능숙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INSS)의 이란 연구 책임자인 라즈 짐트는 WP에 "이란이 경제 상황이나 산업, 일부 전략적 능력 면에서는 약화했을 수 있다"면서도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 더 대담하고 자신감에 찬 새로운 이란을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란의 핵심 요직에는 군과 정보기관 출신 강경파들이 대거 포진했다.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을 맡은 모하마드 바게르 졸가드르는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출신이다. IRGC 총사령관이 된 아흐마드 바히디는 2022년 여성 인권 시위 당시 유혈 진압을 주도한 강경파로 꼽힌다. 최고지도자의 새 군사 고문인 모흐센 레자이 역시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공격에는 더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온 인물이다.
반면 미국과 협상 창구 역할을 해온 민간 정치인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미국과의 협상을 담당하며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이지만, 이번 권력 재편 과정에서 영향력이 약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란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굴복할 온건파로 교체됐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과 군사 압박이 오히려 이란 내부 강경파에 힘을 실어줬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란의 문명을 말살하겠다"는 식의 위협은 이란 강경파들에게 미국과의 대결을 '실존적 생존 투쟁'으로 규정할 명분을 제공했고, 온건파와 협상파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현재 이란 지도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로서 정상적인 직무 수행 능력을 갖췄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관리 노먼 룰은 "최고지도자가 부친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란 국내외에서는 그의 건강 이상이나 권력 약화를 의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익명을 요구한 이란 외교관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암살 시도를 우려해 모즈타바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WP는 이번 전쟁을 통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가장 강력한 전략적 지렛대로 재발견했다고 평가했다. 새 지도부는 미국의 중동 우방을 겨냥한 보복 공격과 호르무즈 해협 유조선 운항 차단 위협을 통해 경제적 압박 효과를 극대화했고, 이를 협상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4월 휴전 발표 이후에도 이란은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 일부 경제적 양보를 끌어내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서사를 구축했다고 WP는 전했다.
유럽의 한 고위 관리는 WP에 "이란 지도부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며 "그들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호르무즈 해협이 거대한 협상 지렛대라는 사실을 재발견했고, 이제는 자신들이 협상 조건을 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공세는 이란 체제 붕괴나 온건파 부상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강경파 중심의 새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한 셈이다. WP는 이란의 새 지도부가 과거보다 더 젊고 노련하며 더욱 강경한 노선을 보이고 있다며,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에 주이란한국대사관이 참석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이란 정부의 사정을 감안해 참석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의 초청을 받아 대사관 측이 조문하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지만 이란 정부가 막판 조문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해오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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