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할양을 콕 집어 요구한 것은 이 지역이 푸틴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상징적인 곳인데다 군사적 차원에서 대단히 큰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군은 그 동안 집요한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돈바스 전 지역을 완전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이곳의 방어선을 넘으면 우크라이나 중부와 북부, 남부로 거침없이 진출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와 최전선. [사진=로이터 뉴스핌] |
돈바스(Donbas)는 도네츠강이 흐르는 도네츠 석탄분지(Donets Coal Basin)의 줄임말이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2개 주(州)를 합친 지역으로 전체 면적(약 5만3200㎢)은 남한 면적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러시아군은 현재 북쪽 루한스크는 거의 점령했고, 도네츠크는 75%를 장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아직도 지키고 있는 면적은 서울의 약 11배 6600㎢ 정도이다. 이 곳에는 아직도 우크라이나 민간인 25만명이 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군이 지키고 있는 도네츠크 서부 지역에 '철통 같은' 요새 벨트(Fortress Belt)를 구축하고 있어 러시아군이 이 곳을 점령하려면 몇 년이 걸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푸틴 입장에서는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는 곳을 트럼프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얻어내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 길이 50㎞ 철통 같은 방어선
도네츠크의 요새 벨트는 슬로비얀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 드루즈키우카, 콘스티안티니우카 등 4개 주요 도시와 여러 마을로 이뤄진 50㎞ 길이의 지역이다.
산업이 발전하고 비교적 도시화가 잘 돼 있어 건물과 산업 시설이 밀집된 '자연 장벽' 형성돼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여기에 철조망과 콘크리트, 자갈, 전차 차단용 콘크리트 '용의 이빨' 등을 겹겹이 쌓아 방어막을 더욱 보강했다.
싱크탱크인 방위전략센터 소장인 안드리 자고로드니우크 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지난 10년간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 곳의 군사 인프라와 요새화에 엄청나게 투자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기습 침략 이후 슬로비얀스크 점령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크라마토르스크는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주요 병참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 |
[하르키우 로이터=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우크라이나군 제58 독립기계화 보병여단 소속 BTR-4 장갑차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동북부 하르키우 지역에서 실시된 군사훈련에서 30mm ZTM-1 자동포를 쏘고 있다. 2025.08.12. ihjang67@newspim.com |
우크라이나는 지난 2023년 이 지역 요충지 중 한 곳인 바흐무트를 빼앗기고 대반격에도 실패한 이후 이 요새 벨트를 더욱 강화했다. 전방에서 후방까지 수 ㎞에 걸쳐 벙커와 참호로 이뤄진 수동적 방어시설과 지뢰밭, 전차 함정과 같은 능동적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러시아군은 도네츠크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1년 동안은 요새 벨트를 우회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약 64㎞ 떨어진 포크로우스크를 점령하려고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미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는 "러시아군은 도네츠크 전투에서만 지난 2023년 10월 이후 17개월 동안 5개 사단을 무장할 탱크와 장갑차를 잃었고, 지금도 매달 1만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 푸틴 "돈바스 내 러시아계 주민 보호" 내걸고 전쟁 일으켜
우크라이나는 지난 1994년 12월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이 참여한 가운데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영토와 주권을 보장받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옛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는 친서방 세력과 친러 세력이 계속 충돌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커졌고, 2014년 초 마이단 혁명을 통해 친러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면서 최대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는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투쟁이 발생했다.
이후 평화를 위한 민스크 협정 1·2(2014년 9월~2015년 2월)가 체결됐지만 돈바스 지역 갈등은 계속됐고, 러시아는 2022년 2월 이 지역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내걸고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푸틴은 이미 2014년에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을 2022년 7월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했다.
푸틴 입장에서 돈바스는 전쟁을 일으킨 이유이자 명분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차지하지 못한 채 휴전 또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실패로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위해 알래스크 앵커리지의 엘멘도프리차드슨 합동 기지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로이터뉴스핌] |
◆ 도네츠크 뚫리면 중부 지역까지 속수무책
2014년 크림반도 불법 병합과 돈바스 전투가 시작된 이후 2022년 러시아의 침공 때까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세력은 치열하게 싸웠다. 8년 간 양쪽에서 1만4000명 이상이 죽었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전투에서 요새 벨트 지역의 4개 도시 등을 탈환한 뒤 요새화를 시작했다. 나머지 돈바스 지역 대부분은 친러 세력이 강했다.
점령이 어려운 반면, 일단 점령 후에는 러시아군이 추가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우크라이나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이 곳을 넘으면 자연 방어물이 없는 평원이 펼쳐진다. 하르키우와 폴타바, 드니프로 등 중부와 북부 주요 도시로 가는 길이 열린다.
자고로드니우크 전 국방장관은 "요새 지대 인프라가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면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작용해 추가 공격의 발판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국방부 고위 관료 출신인 니코 랑게는 "요새 지대 점령은 러시아군에게 하르키우 후방과 드네프르 강 유역의 드니프로, 그리고 결국 우크라이나 중부로 향하는 작전 경로를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