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승우 기자 =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스로픽이 기업공개(IPO)를 위해 공개한 증권신고서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AI 칩과 함께 직접 조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클라우드를 빌려 쓰던 AI 개발사가 HBM 수요를 좌우하는 '최종 구매자'로 나섰다는 의미다. 앤스로픽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거명하며 HBM 공급 부족 가능성도 사업 위험으로 명시했다.
앤스로픽은 향후 10년간 약 8500억달러(약 1100조원) 규모의 컴퓨트(AI 연산 인프라) 계약을 이미 확정해 둔 상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AI 모델 기업들의 투자 확대로 HBM 병목이 길게는 2030년까지 이어지고, 메모리 업체들이 가격협상력 등 시장 주도권을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 "증설해도 공급 부족할 수 있다"…대형 고객 물량 선점 경고
앤스로픽은 26일(현지시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S-1)에서 "AI 가속기와 CPU, HBM 등 관련 부품을 마스터 장비 리스 계약을 통해 조달하고, 이 장비를 당사를 위해 운영되는 전용 데이터센터에 배치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체 약정 지출의 상당 부분이 이 같은 직접 조달 방식과 관련돼 있으며, 그 비중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앤스로픽은 또한 리스크 요인에서 "HBM과 고성능 메모리는 대부분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이 생산한다"며 "제조사가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수요를 따라잡을 만큼 빠르게 충분한 공급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
또 "대형 고객이나 경쟁사가 독점 공급 약정을 맺거나 제조사 생산능력의 사실상 전부를 확보할 경우 공급 부족이 심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형 AI 기업들의 메모리 물량 확보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오픈AI는 지난해 10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각각 메모리 공급 의향서(LOI)를 맺었다. 두 회사는 오픈AI의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사업 '스타게이트'에 D램 웨이퍼 기준 월 최대 90만장 규모의 메모리를 공급하는 파트너로 참여하기로 했다.
TSMC 의존 문제도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앤스로픽은 "세계 최첨단 칩 생산능력은 대부분 대만, 주로 TSMC에 집중돼 있다"며 "TSMC가 시장 수요를 다 충족하지 못한 때가 있었고, 이에 따라 칩을 제때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수요가 회사 예상을 웃돌고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앤스로픽은 "과거 컴퓨트 필요량을 크게 과소평가해 용량 부족을 겪었고, 이는 제품 개발과 배포 모두에 영향을 줬다"고 기재했다. AI 수요 증가 속도가 회사 스스로의 예측마저 앞질렀다는 의미다.
◆ 칩 공급망 나눠도…HBM은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으로 수렴
신고서에 따르면 앤스로픽의 컴퓨트·인프라 확정 약정은 지난 6월 말 기준 약 5870억달러로, 지난해 말(약 1050억달러)의 5배를 넘었다. 7월 이후 새로 맺은 계약(약 2450억달러)까지 더하면 약 8500억달러다.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구글 TPU 추가 조달분(1250억~1500억달러)과 AMD 계약(200억달러 이상)을 포함하면 1조달러에 육박한다. 올해 상반기 매출(163억달러)의 50배가 넘는 규모다.
앤스로픽은 특정 업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멀티칩' 전략을 쓴다. 신고서에 공개된 주요 계약을 칩 종류별로 분류하면 구글 TPU가 약 52%로 가장 많고, 엔비디아 GPU 약 32%, 아마존 트레이니엄 약 14%, AMD GPU 3% 이상 순이다. 구글과는 최소 1145억달러, 브로드컴과는 1612억달러 규모의 TPU 장비 리스, 아마존과는 최소 1100억달러 계약을 맺었다. AMD와는 내년부터 MI450 기반 시스템을 200억달러 이상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칩 공급처를 나눠도 HBM은 결국 3사에서 받아야 하는 구조다. AI 가속기는 엔비디아·AMD·구글·아마존이 설계하지만, 로직 칩 생산과 첨단 패키징(CoWoS)는 TSMC가 주로 맡는다. 칩 옆에 붙어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주고받는 HBM은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 3사가 공급한다.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 차세대 '베라 루빈'용 HBM4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공급하고, AMD MI450과 구글 TPU용 HBM4는 삼성전자가 주요 공급사로 알려져 있다. 앤스로픽이 어느 칩 진영의 물량을 늘리든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이 공급하는 HBM 물량이 컴퓨트 확보의 상한선이 된다.
HBM 병목이 재무 부담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앤스로픽은 칩을 직접 리스해 전용 데이터센터에서 운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칩 조달과 데이터센터 임대, 시설 운영 계약을 따로 맺는다. 앤스로픽은 "다른 참여자의 지연으로 사용 가능한 컴퓨트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각 거래상대방에게 대금을 지급해야 할 수 있다"며 "쓸 수 있는 컴퓨트 없이 상당한 현금이 유출될 수 있다"고 밝혔다.
◆ 메모리 업계 "공급 부족 2028년 이후까지, 공급자 우위 이어진다"
반도체 업계는 공급 부족이 단기간에 풀리기 어렵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공급업체 모두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반도체 공장은 건설에만 3년가량 걸리고 완공 후에도 생산량을 끌어올리는 램프업 기간이 필요하다"며 "업계 전반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공급자 우위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수급 불균형이 2028년, 길게는 2030년까지 이어지고 공급자 우위 시장이 계속될 것으로 본다. AI 기업들의 컴퓨트 투자 경쟁이 이어지는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HBM 공급 여력이 AI 인프라 확장 속도를 좌우하는 변수가 될 전망이다. 공급 부족이 이어지면 HBM 가격 협상에서도 메모리 업체들이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신고서 내용에 과도한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는 반응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HBM 공급사가 3곳이고 공급이 빠듯하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증권신고서의 위험 요인은 투자자가 알아야 할 정보를 망라해 기재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raul1649@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