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24일 중국 단둥(丹東)시를 전격 방문해 북중 친선을 과시하고 중국 최고지도부와의 전략적 소통에 나섰다.
중국의 6.25전쟁 개입 76주년을 하루 앞두고 랴오닝성 단둥을 찾은 김정은은 중국 권력서열 4위인 왕후닝(王滬寧)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과 만나고, 중국군의 6·25전쟁 참전을 기리는 소위 '항미원조기념관'을 참관했다.
이번 방문은 일단 최근 제기된 김정은 '사망설'과 '대역설'을 일축하는 동시에 북러 밀착으로 상대적으로 소원해졌다는 평가를 받아온 북중 관계의 복원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번 방문은 평양에서 신의주로 이동한 뒤 지난 15일 개통한 신압록강대교를 건너 단둥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김정은은 왕후닝과 기념관을 둘러보고 중국군 전사자들을 추모한 데 이어 단둥의 버스공장을 방문하고 당일 평양으로 돌아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직접 회동은 없었지만, 왕후닝을 통해 시 주석에게 안부를 전하고 북중 간 전략적 소통 의지를 강조한 점도 눈길을 끈다.
또 다음 달 중순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거론되는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과 관련해 중국의 역할을 타진·요청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 '사망설' 조기 차단 위해 중국서 공개활동
김정은의 이번 방중은 시점부터 눈길을 끈다. 그는 지난 19일 평양에서 열린 피복·신발 전시회에 딸 주애와 함께 등장한 뒤 북한 매체 보도에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어 북한이 중대장대회를 개최하고 이 자리에 김정은이 참석한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공개됐지만 외부에서는 신변 이상설이 확산됐다. 일부에서는 사망설에 이어 대역설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중국을 방문해 고위 인사들과 공개적으로 만나고 현지 일정을 소화한 것은 신변 이상설을 일축하고 확산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북한은 2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정은의 단둥 방문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중앙통신은 무려 39장의 사진을 무더기로 쏟아내면서 최고지도자의 '건재'를 대내외에 확인시켰다.
다만 이번 행보를 통상적인 북한 최고지도자의 방중이나 정상회담 일정과 동일하게 보기는 어렵다. 방문 장소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아닌 북중 접경도시 단둥으로 한정됐고 일정도 항미원조기념관 참관과 버스공장 시찰, 왕후닝과의 회담 및 연회 등으로 짜여졌다.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2018년 5월 시진핑 주석이 랴오닝성 다롄(大連)의 휴양지까지 달려와 정상회담을 했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북한도 이번 방문을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빈급 외교 일정이라기보다 단둥 현지 방문 형식으로 규정했다.
김정은이 단둥에서 별도의 대규모 경제협력 행사나 정치적 선언을 내놓지 않고 버스공장 방문 등 제한적인 일정을 소화한 것에 그친 대목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물론 항미원조기념관 참관과 왕후닝 면담 자체에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지만, 방문 규모와 장소·일정만 놓고 보면 '방문을 위한 방문'이란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알맹이는 없는 것으로 분석된다.
◆ 북중 관계 복원 알리고 '전략적 공조' 강화
이번 방문의 핵심은 북중 간 전통적 친선과 전략적 공조를 다시 부각했다는 데 있다.
김정은이 중국군의 6.25전쟁 참전을 기리는 항미원조기념관을 찾아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한 대목은 이를 알 수 있게 한다.
중국은 북한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난 시점인 1950년 10월 19일 참전했으며,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김정은은 기념관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자들에게 헌화하고, 친필 문구를 담은 역사 사진을 기념관에 기증했다.
김정은은 왕후닝과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항미원조기념관은 불패의 조중 친선에 대한 고귀한 피의 검증"이라고 말했는데, 중앙통신은 "시련을 함께 헤친 훌륭한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고 영원히 고수하며 피로써 맺어진 불패의 조중 친선을 영원히 굳건히 계승해나갈 우리 당과 정부, 우리 인민의 의지를 확언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정은의 단둥 방문과 기념관 방문은 치밀한 계산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전을 계기로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확대하면서 북러 관계를 전례 없이 밀착시켜 왔다.
북한이 러시아에 1만4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과 152mm 환산 1500만발의 포탄 등 군수물자를 지원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베이징의 지도부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하는 상황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역시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가 중국과의 관계 소홀로 이어진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 중국은 북한의 수입물량 중 85~90%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 상대국이자 경제적 후견국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북러 밀착이 강화되더라도 북한이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평양과 베이징 모두에 외교적 이익이 된다.
특히 이번 방문은 지난해 9월 김정은의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 참석 이후 약 1년여 만에 이뤄졌다.
지난 6월에는 시 주석이 북한을 방문했고, 양측은 정상 간 합의를 토대로 관계 발전 의지를 강조해 왔다. 이번 단둥 방문은 북중 정상의 상호 방문으로 조성된 관계 개선 흐름을 재확인하는 성격도 있다.
왕후닝과의 만남 역시 의미가 작지 않다. 왕후닝은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정협 주석으로, 중국 권력서열 4위에 해당하는 핵심 인사다.
김정은이 시 주석과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왕후닝과 회담하고 시 주석에게 안부를 전한 것은 양국 최고지도자 사이의 소통 채널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신압록강대교를 둘러싼 교류 확대도 관심사다. 북중 양측은 지난 15일 신압록강대교 개통식을 열었지만, 교량 개통만으로 교역과 인적 왕래가 자동으로 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국경 개방과 주민 이동 확대에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만큼 이번 방문이 실질적인 교류 확대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 시진핑에 북미 대화 중재 요청했나
이번 방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중국이 향후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다.
다음 달 선전 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다는 관측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지난 19일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모르겠다"고 밝히면서, 지난 8월 김정은과 '연내 만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던 것과는 다소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연내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중국을 찾은 것은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외교적 포석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 중간선거(11월 3일)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가 평양 측 기대와 달라지자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종의 'SOS'를 보냈을 가능성이다.
중국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대화 재개를 촉진하는 중재자 역할을 맡아준다면, 김정은으로서는 북미 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은 지난 2018~2019년 북미 정상 간 대화 국면에서도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당시 북한은 미국과의 정상외교에 나서기 전후로 시 주석과 만나 대미 협상 전략을 조율하고 중국의 외교적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
이번에도 북미 대화 가능성이 다시 거론되는 시점에 중국과의 소통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외교 행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관측이다.
중국 역시 북미 대화 재개에 일정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 북미 간 긴장이 완화되면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과 직접 협상에 나서면서 중국이 소외되는 이른바 '차이나 패싱'을 방지하고,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존재감이나 대북 영향력을 유지·과시하려는 계산도 가능하다.
반대로 중국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지는 불확실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북미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무조건 환영하기보다, 대북 영향력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상황을 관리하려 할 수 있다. 북러 밀착을 견제하면서도 북한을 미국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이해관계가 함께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번 방중을 중국의 북미 정상회담 중재가 이미 시작됐다는 신호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김정은이 중국 지도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북중 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사실은 향후 북미 대화가 추진될 경우 중국이 일정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외교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대남적대' 당위성 설명 가능성
이번 단둥 방문 과정에서 김정은이 남북관계와 관련한 북측 입장을 시진핑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은 최근 김정은의 대남적대 노선에 따라 남북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대남 강경 노선을 지속하고 있다. 최전방 지뢰도발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긴장과 북한의 대남 비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평양으로서는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킨 책임이 이재명 정부에 있다는 논리를 중국에 주장했을 공산이 크다.
중국은 한반도 긴장 고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다. 북한의 대남적대 정책이 군사적 긴장으로 이어질 경우 중국의 역내 외교·안보 환경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려는 시점에 남북관계가 악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 현안이 양측의 대화 의제에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김정은이 이번 단둥 방문은 ▲사망설과 대역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공개 행보를 통해 체제 건재를 과시 ▲항미원조기념관 참관과 왕후닝 면담을 통해 북중 친선과 전략적 공조를 재확인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이 불확실해지는 가운데 중국의 외교적 역할 타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당일치기 일정과 단둥이라는 제한된 방문 장소는 이번 행보가 대규모 외교 이벤트라기보다 김정은의 필요에 의한 제한적인 행보로 읽혀지도록 한다.
향후 관건은 이번 방문이 실제 정책 변화나 김정은의 구체적인 대외 행보로 이어지느냐다. 신압록강대교를 통한 인적·경제 교류가 확대되는지, 중국이 북미 대화 재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남북관계에 있어 시진핑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가 이를 가늠할 잣대가 될 수 있다.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