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정부가 공장 신설 등 고도의 경영상 결정을 노동쟁의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신규 투자에 수반되는 인력 배치전환은 교섭·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열어뒀다. 공장을 짓겠다는 결정은 기업이 할 수 있어도 실제 가동을 위한 인력운영계획이 구체화되면 노사 협상이라는 변수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기존 사업장의 숙련인력 투입이 필수적인 반도체 산업에서는 인력 재배치가 곧 투자 실행과 직결돼 수백조원 규모의 호남권 반도체 메가프로젝트에도 불확실성이 남게 됐다.
재계와 학계에서는 글로벌 반도체 투자 속도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신규 투자·증설에 따른 통상적인 배치전환은 노동쟁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기준을 법령에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공장 신설은 교섭 대상 제외…인력계획 구체화 땐 배치전환 교섭 가능
3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에 따르면 공장 신설·이전, 사업 매각·인수, 인공지능(AI)·자동화 설비 도입 등 사업경영상 결정 자체는 원칙적으로 의무적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다. 호남권 반도체 공장 신설 자체에 반대하는 요구 역시 교섭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명시했다.
다만 공장 신설에 따른 인력운영계획 등이 수립·결정돼 배치전환이 구체화되는 경우에는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근무지나 직무 등 근로조건의 변동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단계에 이르면 배치전환과 이에 따른 근로조건 문제가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노동부의 판단이다.
재계가 문제 삼는 대목도 여기다. 신규 투자나 공장 증설에 따른 배치전환을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력 재배치와 명확하게 구분해 달라는 요구가 이번 지침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공장 신설·이전이나 사업 매각, 신기술 도입 등 경영상 결정은 인력 배치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며 "지침은 이러한 결정 자체는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인력 배치나 업무·근무지 변경 계획이 마련되면 교섭·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같은 기준이 현장에서 폭넓게 적용될 경우 기업의 투자와 경영 활동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신규공장 가동에 숙련인력 이동 필수…호남 프로젝트도 교섭 변수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 같은 불확실성이 다른 산업보다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규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기존 사업장의 숙련 엔지니어를 먼저 투입해 초기 수율을 끌어올리고 신규 인력에게 공정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해 반도체 산업에서 인력 재배치는 "투자의 부수 업무가 아니라 곧 투자 실행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공장 신설 결정을 경영권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를 실행하기 위한 인력 배치를 폭넓게 교섭 대상으로 볼 경우 투자 결정과 실행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남권 반도체 메가프로젝트를 둘러싼 노사 갈등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초기업노조는 지난 7월 조합원 설문조사를 근거로 호남 반도체 프로젝트를 향후 교섭 의제로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날 지침에 따라 공장 신설 자체에 대한 반대는 교섭 대상이 아니지만 향후 구체적인 인력운영계획이 마련될 경우 배치전환을 둘러싼 노사 협상이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AI·반도체를 둘러싼 기술패권 경쟁은 결국 "인재를 얼마나 신속하고 유연하게 투입할 수 있는지의 싸움"이라며 신규 설비에 숙련인력을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어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조계에서도 구조조정에 따른 배치전환과 신규 투자에 따른 배치전환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자가 인력 감축이나 기존 고용관계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생산능력 확대와 신규 조직 운영을 위한 인력 배분이라는 점에서 목적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업의 투자결정을 배치전환 반대를 위한 노동쟁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노조에 사실상 '투자 거부권'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행정지침으론 한계"…신규투자 배치전환 법제화 요구
문제는 행정지침만으로 이 같은 논란을 해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노동부도 시행령 등을 통한 기준 마련을 검토했지만 현행 노동조합법에 구체적인 위임 근거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 시행지침 형태로 기준을 제시했다.
김덕호 성균관대 교수는 "법률의 모호성을 하위규범으로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훈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도 사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노동3권과 경영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법률 차원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재계와 일부 학계에서는 노동조합법에 위임 근거를 마련한 뒤 시행령에 신규 투자·공장 신설·증설에 따른 통상적인 배치전환은 노동쟁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기준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투자에 필요한 인력 배치 자체는 경영 판단의 영역으로 보장하되 원거리 전보에 따른 주거·교통비 지원 등 근로자의 실질적인 불이익은 노사가 별도로 협의하는 방식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날 "공장 신설이나 AI 등 신기술 도입과 같은 고도의 경영상 결정에 수반되는 인력 배치까지 교섭 대상으로 열어둔 것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유연한 대응을 제약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메가프로젝트나 적기의 사업 재편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에서는 절차적 불확실성이 기업의 실질적인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침을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시행령 등 보다 명확하고 안정적인 법적 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yu@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