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계기로 확보한 자금을 포함해 국내 생산시설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에 총 57조4000억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제시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과 청주 P&T7 첨단 패키징 공장을 확충하고, 11조9000억원을 들여 EUV 장비를 확보하는 구상이다. HBM 경쟁의 병목이 웨이퍼 생산능력뿐 아니라 미세공정, 적층, 패키징, 검사 등 공급망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SK하이닉스가 전공정과 후공정을 동시에 강화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57조 투자…용인·청주 'AI 메모리 투트랙' 구축
13일 SK하이닉스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이번 공모로 조달한 자금을 포함해 모두 57조원을 투자한다. 국내 생산시설 건설에 45조5000억원, EUV 노광장비 확보에 11조9000억원을 투입한다. EUV 장비는 내년 말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받을 예정이다. 부족한 투자 재원은 영업현금흐름과 차입 등으로 조달한다는 방침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Fab1)에는 31조원을 투입해 전공정 생산능력을 확대한다. 청주 P&T7에는 19조원을 투자해 HBM 첨단 패키징 역량을 키운다. 여기에 EUV 노광장비 확보를 위한 11조9000억원 투자까지 더해 전공정과 후공정을 동시에 강화해 HBM 공급망의 병목을 줄인다는 구상이다.
◆HBM 시대, 승부는 웨이퍼보다 '병목' 해소
과거 범용 D램 시장에서는 웨이퍼 생산능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공급량을 결정했다. 그러나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한 뒤 실리콘관통전극(TSV) 공정과 첨단 패키징, 최종 검사까지 거쳐야 해 전공정부터 후공정까지 모든 단계가 생산 병목이 될 수 있다. 여기에 HBM과 차세대 D램으로 갈수록 EUV 노광 공정 비중도 빠르게 높아지면서 첨단 장비 확보 여부 역시 생산능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결국 AI 메모리 경쟁에서는 단순히 웨이퍼 생산량을 늘리는 것보다 EUV와 TSV, 첨단 패키징, 검사 공정을 얼마나 균형 있게 확보하느냐가 HBM 공급량과 시장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는 평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AI 시대에는 메모리 산업의 경쟁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10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옛날과 똑같은 사이클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해졌다"며 "지금은 수요가 자라는 속도가 공급을 늘리는 속도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AI는 이제 네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며 "범용인공지능(AGI)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학습이 계속될 것이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용인은 전공정, 청주는 패키징…생산거점 역할 분담
SK하이닉스는 용인을 차세대 D램 전공정 생산 거점으로, 청주를 HBM 첨단 패키징과 차세대 메모리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공정별 역할을 분담해 AI 메모리 공급망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청주 M15X는 EUV 공정과 첨단 클린룸 자동화를 적용한 차세대 생산공장으로, 향후 신규 팹의 표준(blueprint)이 될 것으로 회사는 소개했다. 올해 1분기 웨이퍼 투입을 시작한 M15X는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AI 메모리 수요 증가에 대응할 계획이다.
◆11.9조 EUV 베팅…첨단 공정 선점 승부수
이번 투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EUV 노광장비다. SK하이닉스는 전체 투자금의 20%가 넘는 11조9000억원을 EUV 장비 확보에 배정하며 AI 메모리 경쟁의 핵심인 첨단 공정 역량 강화에 승부수를 던졌다. 업계에서는 현재 ASML의 최신 EUV 장비 가격을 기준으로 약 40대 규모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계획대로 장비를 확보할 경우 SK하이닉스는 TSMC와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EUV 인프라를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
투자도 AI 메모리 생산능력 확대 시기에 맞춰 집중된다. 회사는 올해 7조9000억원을 시작으로 2027년 12조2000억원, 2028년 9조3000억원, 2029년 8조3000억원, 2030년 7조8000억원을 순차적으로 집행할 계획이다. 투자 규모가 가장 큰 2027년에는 용인 1기 팹 건설과 청주 P&T7 구축, EUV 장비 도입이 동시에 본격화될 예정이다.
◆'팹 경쟁'에서 '공정 경쟁'으로
업계에서는 AI 시대 메모리 경쟁의 핵심이 생산량 확대에서 첨단 공정과 패키징 역량 확보로 이동했다고 평가한다. EUV 장비와 첨단 패키징을 선제적으로 확보한 기업이 HBM 공급량과 시장 지배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ADR 상장 기념식에서 "HBM은 이제 AI 혁명의 중심에 서 있다"며 "AI가 있는 모든 곳에 SK하이닉스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리더십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증명을 통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syu@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