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작은 한지들을 불에 그슬리고 태운 뒤 그 조각을 쌓고 겹쳐올리며 오묘한 작품을 만드는 김민정이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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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김민정 'Clouds', 2024, 한지에 혼합매체, 39.5×48cm [사진=갤러리현대] 2025.09.25 art29@newspim.com |
프랑스 남부 도시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인 김민정이 갤러리현대에서 'One after the Other'라는 타이틀로 작품전을 연다. 오는 10월 19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김민정이 이번에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 'Zip' 연작과 스위스의 아트바젤 바젤 언리미티드 섹터에 선보인 대형 작업 'Traces'가 출품됐다.
김민정은 동아시아의 서예와 수묵화 전통, 그리고 동양 철학을 탐구하며 현대 추상작업을 전개한다. 작가만의 고유한 한지 추상작업을 30여 년간 지속하며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 2017년 '종이, 먹, 그을음: 그 후', 2021년 'Timeless(타임리스)' 이후 세 번째로 갤러리현대와 손잡고 여는 개인전이다. 또한 지난 2024년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에 위치한 권위있는 현대미술 재단인 매그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 'Mountain'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국내서 개최하는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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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김민정 'Zip', 2025, 한지에 혼합매체, 69×100cm [사진=갤러리현대] 2025.09.25 art29@newspim.com |
특히 이번 전시에는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Zip' 연작 6점이 나와 작가의 또다른 변화를 보여준다. 김민정은 불에 태워진 한지를 지그재그로 쌓아 올리며 두 개별적인 요소를 결합해 보다 색채감이 강조된 신작을 시도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가 결합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Zip'시리즈는 불태우기, 반복되는 중첩, 그리고 종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통해 이중성과 통일성, 변형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보여준다.
작가는 은은한 색감으로 염색한 띠 모양 한지의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그 조각들을 층층이 겹쳐 지그재그 패턴으로 엮었다. 이러한 지그재그 패턴은 일종의 리듬감 있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음새이자 꿰매어진 균열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조각은 고유한 존재이지만,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전체적인 의미를 완성한다.
'Zip'은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환기하는 제목이다. 불태우는 행위는 파괴를 암시하지만, 조각들을 겹치고 정렬하는 과정은 치유를 의미한다. 두 조각을 하나로 모으는 이같은 행위는 '균열'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회복'을 위한 상징적 제스처가 된다. 작가에게 한지는 색색의 물감이자 회화의 대상 그 자체이며, 명상과 수행을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김민정은 'Zip' 연작에 대해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요소가 맞닿아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지그재그 형태 속에서 이중성은 마침내 하나로 수렴되고, 그 과정 자체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불에 그을린 종이를 한장 한장 이어 붙이면, 상처를 감싸는 치유와 조화의 숨결이 피어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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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김민정의 출품작 세부. 한국의 전통한지를 불에 그을리거나 태운 뒤 그 조각들을 켜켜이 쌓아올린 작업이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9.25 art29@newspim.com |
한편 전시 타이틀 'One after the Othher'는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생성되는 연결성과 통일성,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이중성과 명상적 흐름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을 내포하는 제목이다. 고요하고 느릿느릿 하지만 점진적으로 축적되며, 삶이 마치 '하나' 다음에 또 '하나'의 순간들로 구성되듯 결국 '연결'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타이틀이다. 작가는 연결을 통해 단절과 연속, 파괴와 생성, 개별과 전체라는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지점을 탐구한다.
지하 1층에는 작가의 대표 연작 'Mountain'이 나왔다. 'Mountain'은 바다의 파도소리를 화폭에 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한 연작이다. 파도가 절벽에 힘차게 부딪히면서 쌓여가는 소리가 겹겹이 얹히는 먹의 레이어로 표현되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고향 광주의 산을 스르르 대입한다. 그 산은 작가 내면에 자리한 '산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김민정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자리잡은 '산의 본질'에 가까운 이미지를 한 폭의 시처럼 맑고 광활하게 구현한다. 나아가 산과 바다가 종국에는 '대지'라는 만물의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토대에서 시작됐음을 상기해볼 때, 바다를 표현한 것이 산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작가 작업세계의 주요한 '명상, 순환, 통일성'과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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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김민정 작가가 지난해 스위스 아트바젤 바젤의 언리미티드 섹터에 출품해 호평받은 가로 8m의 대형 작품 'Traces'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공개됐다. [사진=갤러리현대] 2025.09.25 art29@newspim.com |
갤러리현대 지하 전시장에는 지난해 아트바젤 바젤 언리미티드 섹터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던 대형 작품 'Traces'가 자리를 잡았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작품은 가로 8m에 달하는 대작이다. 'Mountain'을 중심으로 양측 벽에는 'Mountain'을 얇게 자른 뒤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이를 섬세하게 배열한 'Timeless' 2점이 나란히 설치됐다. 시간을 초월한 이 작품은 존재, 바닷물결의 소리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두 연작의 물질적, 형식적 연계를 통해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 추상적 지평선을 구축하고 있다.
2층 전시장에서는 '연결'과 '공존'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작업들이 나왔다. 김민정의 작업세계를 더욱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들로, 투명하고 중첩된 한지 조각들이 독립된 개체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 형태로 드러내는 'Encounter', 작고 연약한 존재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가느다란 잉크 선으로 연결하거나 뻗어나가게 한 'Predestination'을 만나볼 수 있다. 또 먹과 수채물감이 서로 밀어내는 효과를 이용해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터지는 찬란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Firework'도 내걸렸다. 이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는 존재 간의 연결과 시공간 속 찰나의 의미를 사유하도록 하고 있다.
작가의 주요 연작과 신작 등 총 20여 점이 나온 전시를 통해 관객은 태우기, 반복이라는 명상적 행위와 종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통해 그동안 작가가 탐구해온 물질성, 반복성, 그리고 우연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차분히 음미해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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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작가 김민정이 갤러리현대 2층 전시실에 내걸린 작품 앞에 섰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9.25 art29@newspim.com |
◆김민정 작가는?=1962년 광주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당시 남성 중심이었던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작가의 한계를 체감한 그는 1991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밀라노에서 수학하며 작가는 한지에 안료가 스며드는 예측불가능한 효과에 매료돼 수묵과 채색추상화로 작업방향을 틀었다. 이후 2000년대에는 한지를 자르고 태우는 명상적이면서도 실험적인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회화의 전통을 해체, 재해석하는 작업을 전개해 각광받고 있다.
김민정은 그간 갤러리현대(2025, 2021, 2017), 생폴 드 방스의 매그재단(2024), 파리 알민레쉬 화랑(2024), 멕시코시티 노던 하케갤러리(2024), 생모리츠의 로빌란트+보에나(2023), 함부르크의 갤러리코메티(2021), 뉴욕 힐아트파운데이션(2020), 런던 화이트큐브(2018), 광주 광주시립미술관(2018) 등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타이베이비엔날레(2025), 광주비엔날레(2023) 등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토리노의 폰다치오네 팔라초 브리케라시오, 런던 테이트모던, 런던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유수의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